(9월 14일) 선택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 스 5장 1 ~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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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월) | 스 5장 1~ 5절 | 선택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
5:1 선지자들 곧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였더니
5:2 이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가 일어나 예루살렘에 있던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시작하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함께 있어 그들을 돕더니
5:3 그 때에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관들이 다 나아와 그들에게 이르되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 성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게 하였느냐 하기로
5:4 우리가 이 건축하는 자의 이름을 아뢰었으나
5:5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보셨으므로 그들이 능히 공사를 막지 못하고 이 일을 다리오에게 아뢰고 그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더라
(도입)
바벨론에 포로가 된 B.C. 605년으로부터 B.C. 536년까지의 70년의 징계는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세워지는 기간이었습니다. 이에 따른 성전 재건은 하나님과 관계 회복을 의미하는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두려움과 환경이라는 두 가지가 이들을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70년 동안 버리진 땅이었던 예루살렘이 너무 황폐하여 먹을거리를 찾기가 힘이 들었습니다. 여기에 겹친 가뭄과 기근의 환경이 성전 재건을 돌아보지 못하게 합니다.
두 번째는 예루살렘을 비롯해서 사마리아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던 총독의 방해와 위협이 성전을 세우지 못하게 합니다. 이 두 가지 이유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한 자신들의 신앙의 근본을 무너지게 만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전의 회복은 선택이 아니라 주어진 사명이었던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을 돌아봅시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회복은 상황에 따른 선택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명령 된 사명이라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이 시대 앞에 놓인 환경 앞에 어떤 사명자로 예배를 회복시켜 나가야 할까요?
(1~2)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앙의 터를 세상의 세력들에게 빼앗김 당하지 않도록 예배의 회복을 위해 동역하는 수고와 주어진 사역에 대해 총력을 다하는 사명자가 되어야 합니다
B.C. 536년 무너졌던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 성전의 지대를 놓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환경에 따른 자신들의 생업의 어려움을 호소합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지역으로부터 가해오는 위협으로 인해 더 이상 성전을 재건할 수 없다며 항변합니다. 여기에 대해 이 상황을 함께 겪고 있는 스룹바벨 또한 더 이상 이들에게 성전 재건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16년의 세월이 흘렸습니다. 그들의 삶은 나아지는 것이 없었습니다. 사마리아 지역으로부터 위협이 가해지는 것이 멈추질 않습니다. 오히려 더 강력해집니다.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의 입을 통해 이스라엘을 책망합니다.(참고, 학 1:5~8절)
학개 선지자의 충격적인 말에 이스라엘은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다시 성전 재건에 박차를 가합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삶과 사마리아로부터 가해오는 위협은 여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경고와 격려의 말씀을 줍니다. “내게로 돌아오라! 너희 조상을 본받지 말라!”, “내가 불쌍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쳐지리라”(참고, 슥 1:3, 4절, 17절, 18절) 비록 마귀의 세력과 같은 세상이 환경을 통해 예배를 방해하고, 세력을 통해 위협해 올지라도 종말의 때를 더욱 예배 가운데 바르게 세워나가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들려주는 음성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를 회복시켜야 합니다. 예배 회복을 위해 학개와 스가랴처럼 함께 동역을 이루는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앙의 터를 세상 세력들에게 빼앗김을 당하지 않도록 예배의 회복을 위해 동역하는 수고와 주어진 사역에 대해 총력을 다하는 사명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한 사람, 한 사람 서로 영적인 끈을 형성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하나를 이루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요소를 물리쳐나가야 합니다.
(3~4) 하나님을 예배하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회복시켜야 하며 권력과 세력을 앞세워 이를 훼방하고 있는 적그리스도의 세력과 펼칠 영적 전투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명자가 되어야 합니다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들린 하나님의 음성에 힘을 얻어 성전을 재건합니다. 힘이 생겨나고, 용기가 생겨납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음성을 들으니 소망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습니다. 페르시아 제국에 속한 총독들의 위협은 더욱 노골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귀환했던 스룹바벨이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총독이었다면, 닷드내는 유프라테스 강 서편 전 지역을 다스리는 총독이었습니다. 스룹바벨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있는 관리였습니다. 그가 자신의 보좌관들을 이끌고 성전을 재건하는 예루살렘에 위협적으로 다가옵니다.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 성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게 하였느냐”(3절) 자신의 허락 없이 성전을 건축하고, 성곽을 건축한다는 것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겠다는 법적인 해석이었습니다.
백성들을 대표하여 닷드내에게 답변하고 있는 장로들에게 이전과 다른 영적인 힘이 느껴집니다. 스가랴를 통해 주신 예언의 말씀이 이들을 영적으로 강한 군사가 되게 만듭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본연의 모습입니다. 총독 닷드내의 위력 앞에 성전 재건은 포기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처소를 지키고자 하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이들로 하여금 담대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현실을 돌이켜 봅시다. 세상 사람들은 예배드리는 장소가 왜! 중요하냐?라고 반문하면서 공격합니다. 적그리스도 세력이 이렇게 영적으로 사람들을 부추겨 몰아갑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교회는 우리의 영적인 처소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방주의 역할을 감당하는 곳이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힘쓰는 성도의 모습을 만들어가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회복시켜야 합니다. 권력과 세력을 앞세워 이를 훼방하고 있는 적그리스도 세력과 펼칠 영적 전투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명자가 되어야 합니다.
(5)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헌신하며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세상 가운데 바르게 증거해 내기를 두려움 없이 달려가는 사명자가 되어야 합니다
위력적인 닷드내 앞에 백성들을 대표해서 장로들이 섭니다. 닷드네는 자신들의 위력 앞에 이스라엘은 성전 재건을 멈출 것이며, 자신에게 용서를 구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스가랴를 통해 주신 예언의 말씀대로 ‘네 대장장이’와 ‘두 구리 산에서 나온 네 병거의 환상’은 단순한 위로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영적 전투에 임한 장로들에게 이 말씀이 전신갑주로 입혀집니다. 당황한 것은 닷드내와 그 보좌관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해결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런 닷드내는 다리오 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합니다. 그리고 답장을 기다립니다.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스 6:1~16) 페르시아 황제인 다리오는 고레스 왕 원년의 조서를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법적인 것을 동원해 성전 재건하는 것을 돕도록 합니다. 심지어 바벨론에 의해 빼앗아 온 성전의 기물을 되돌려주도록 명합니다.
왕이 또 조서를 내려 성전을 재건하는데 필요한 경비를 끊임없이 제공할 것을 명령합니다. (스 6:13)은 말합니다.“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관들이 신속히 준행하니라” 그리고 영적 전투에 헌신한 장로들을 향해 (스 6:14)은 증거합니다. “유다 사람의 장로들이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의 권면을 따랐으므로 성전 건축하는 일이 형통한지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헌신하며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을 세상 가운데 바르게 증거해 내기를 두려움 없이 달려가는 사명자가 되어야 합니다.
(적용)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선택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과 부합됩니다. 교회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처소가 되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장소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가 됩니다. 그러니 초대 교부였던 이그나티우스는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던 겁니다. 종교개혁자인 루터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4세기 신학자요, 북아프르카 주교였던 아우구스티누스 또한 이런 이그나티우스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따릅니다.
교회는 영업장이 아닙니다. 교회는 모임의 단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처소를 적그리스도 세력이 무너뜨리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터를 지켜야 합니다. 주님께서 명하신 구원의 방주를 지켜내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를 회복시켜야 합니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학개와 스가랴처럼 동역을 이뤄야 합니다. 유다의 장로들처럼 세상의 권세 앞에 당당히 맞서는 영적인 전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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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행복한사람님의 댓글
행복한사람 작성일
에스라의 말씀을 묵상하며 오늘을 시작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선택이 아니라 사명이라는 말씀이 나를 회개하게 하고
또 회개하게 하시고 나의 신앙을 점검해보는 아침입니다
나의 믿음의 상태가 어떠하며
과연 말씀대로 살아가고는 있는지
신앙을 사명이 아니라 선택적인 요소가 없는지를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시대는
미디어의 발달로 세상의 유혹들이 내 손안에 쥐어져 있어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한 순간이며
온갖 쾌락의 요소들이 거리에 넘쳐나고
부정과 불의와 거짓은 마치 합법인것 처럼 꾸며져 있어
영적으로 병들어 갈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은 말씀곽 기도를 생명의 무기로 삼아
혼탁한 영적에서 분별되어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힘쓰고 애쓰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는 선택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기도는 선택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전도는 선택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교회를 돌아보는 일은 선택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연약한 이웃을 섬기는 일은 선택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오늘 주님 나라의 일을 사명으로 감당하는 한 날이 되어 은혜가 가득 채워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구름님의 댓글
구름 작성일
주의 말씀을 묵상하며 한 주를 시작하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코로나 시기에 사람들이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면 되지 왜 굳이 교회에 모이냐고 교회를 비난하던 일이 생각납니다. 그 비난의 목소리에는 불신자 뿐만 아니라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배와 교회의 의미를 알지 못했기에 세상의 기준으로 보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여 예배와 교회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의 모습 또한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며 의미 없이 교회에 가지는 않았는지 돌아보며 회개합니다.
종교가 사람의 선택처럼 여겨지며 예배와 교회 또한 사람의 선택으로 여겨지고 있는 이 현실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방해가 되는 요소를 모두 끊어내는 신앙의 결단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도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을 향한 예배를 회복시키기 위해 세상 권력 앞에 당당히 맞서는 영적인 전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Jsw126님의 댓글
Jsw126 작성일
바벨론에 포로가 된B.C605년으로부터B.C536년 까지의 70년의 징계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앞에 세워지는 기간 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앙의 터를 세상의 세력들에게 빼앗기지 않기위해 예배회복을 위해 동역하는 수고와 주어진 사역을 다하는 사명자가 되어야 합니다.
B.C536년 무녀졌던 성전을 지대를 놓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사의 세력들에게 빼앗기지 않아야 합니다.
유다의 장로들 처럼 세상의 권세 앞에 당당히 맞서는 영적인 전사가 되어야 합니다.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신앙.믿음으로 기도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