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3일) 자기 왕국을 바라보는 자 = 왕상 12장 1~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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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금) | 왕상 12장 1~11절 | 자기 왕국을 바라보는 자 |
12:1 르호보암이 세겜으로 갔으니 이는 온 이스라엘이 그를 왕으로 삼고자 하여 세겜에 이르렀음이더라 12:2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전에 솔로몬 왕의 얼굴을 피하여 애굽으로 도망하여 있었더니 이제 그 소문을 듣고 여전히 애굽에 있는 중에 12:3 무리가 사람을 보내 그를 불렀더라 여로보암과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와서 르호보암에게 말하여 이르되 12:4 왕의 아버지가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 12:5 르호보암이 대답하되 갔다가 삼 일 후에 다시 내게로 오라 하매 백성이 가니라 12:6 르호보암 왕이 그의 아버지 솔로몬의 생전에 그 앞에 모셨던 노인들과 의논하여 이르되 너희는 어떻게 충고하여 이 백성에게 대답하게 하겠느냐 12:7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 만일 오늘 이 백성을 섬기는 자가 되어 그들을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하여 이르시면 그들이 영원히 왕의 종이 되리이다 하나 12:8 왕이 노인들이 자문하는 것을 버리고 자기 앞에 모셔 있는 자기와 함께 자라난 어린 사람들과 의논하여 12:9 이르되 너희는 어떻게 자문하여 이 백성에게 대답하게 하겠느냐 백성이 내게 말하기를 왕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메운 멍에를 가볍게 하라 하였느니라 12:10 함께 자라난 소년들이 왕께 아뢰어 이르되 이 백성들이 왕께 아뢰기를 왕의 부친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우리를 위하여 가볍게 하라 하였은즉 왕은 대답하기를 내 새끼 손가락이 내 아버지의 허리보다 굵으니 12:11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아버지는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였으나 나는 전갈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리라 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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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열두 아들’을 원점으로 하여 ‘열두지파’로 구성을 이룬 이스라엘이 ‘나라’가 되는 과정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맺었던 ‘언약’이 근거를 이룹니다. 그 나라에서 하나님은 왕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B.C. 1050년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1010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왕위에 다윗을 세웁니다. 그리고 970년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였던 다윗의 열 번째 아들인 솔로몬이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약관 20세에 왕으로 세워집니다. 하나님 앞에 신앙으로 간절히 서길 원했던 솔로몬의 초기의 모습에 하나님이 적극적인 후원자가 되어줍니다. 그러나 세력이 자신의 손에 잡히자 하나님을 떠난 모습을 합니다. 더 이상 하나님이 그를 후원하지 않습니다.
종교혼합주의 속에 빠져 유일신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신과 언약 관계를 맺은 그를 향해 하나님께서는 진노합니다. 더 이상 하나님 나라라고 부를 수 없는 이스라엘을 솔로몬으로부터 빼앗아버릴 것을 말씀합니다. B.C. 930년 이스라엘의 역사에 드디어 대분열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이 한 사건을 통해 ‘새언약’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언약 백성’인 우리들은 과연 하나님의 나라를 누구의 왕국으로 만들어가고 있는지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를 마치 자신의 왕국인 것처럼 오판하고 행동하는 자들에게는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대표적인 현상들이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과연 어떤 현상들이 나타났을까요? 르호보암의 모습을 여기에 대해 세 가지 점을 조명해 주고 있습니다.
(1~5)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지 못하고 자기 왕국을 바라보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으로부터 자기를 인정받길 원하는 현상이 나타나며 이로 인해 그는 세상의 다스림을 받게 됩니다
B.C. 930년이었습니다. 솔로몬의 뒤를 이어 41세에 르호보암이 왕이 됩니다. 당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비록 하나의 왕국이었지만 열두지파들로 구성되어 서로 이해관계가 복잡한 ‘연방 체계’의 성격을 띠고 있는 ‘연합된 지파의 나라’였습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로 묶기 위해서는 분명한 동기부여가 필요했습니다. 다윗은 동기부여를 위해 이스라엘의 수도를 북쪽에 속한 베냐민 지파의 땅인 ‘예루살렘’으로 옮겼으며,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이동시켰던 것입니다. 르호보암의 발걸음이 북쪽 지파가 있는 곳을 향합니다. 도착한 곳은 ‘세겜’이었습니다. 북쪽 지파의 소외됨에 관해 대변인의 역할을 하는 여로보암이 말합니다. “왕의 아버지가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4절)
르호보암은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는 북쪽 지파를 용인할 수 없었고, 북쪽 지파는 자신들을 인정하지 못하는 르호보암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모두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로보암에 대한 르호보암의 반응입니다. 그는 다윗과 달랐습니다. “삼 일 후에 다시 내게로 오라”(5절) 한 사람은 자신을 인종하지 못하는 북쪽을 품지 못합니다. 또 한쪽은 자신들의 입장을 들어 주지 않으면 왕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둘 다 자기 왕국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아니라 자신이 다스리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자는 자신보다 더 큰 세력에게 다스림을 받게 됩니다. 종처럼 다스림을 받는 고통의 세월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6~8a)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지 못하고 자기 왕국을 바라보는 자는 진정한 통치의 정신은 다스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섬김의 자세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르호보암은 봉착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삼일’이라는 시간적 여유를 가집니다. 삼일간의 시간은 여로보암에게 주어진 시간이 아니라 르호보암 자신에게 필요한 시간이었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르호보암은 아버지 솔로몬의 시대 때 자문역할을 감당했던 ‘원로들’과 자신과 함께 자란 ‘자신의 측근들’에게 자문을 구합니다. 원로들이 왕에게 조언합니다. “왕이 만일 오늘 이 백성을 섬기는 자가 되어 그들을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하여 이르시면 그들이 영원히 왕의 종이 되리이다”(7절) 원로들의 조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위에 왕을 세운 목적을 일깨워주는 중요한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원로들의 권면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종으로 충성스럽게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할 자임을 일깨웁니다. 세상 나라는 통치라는 절대적인 주권을 통하여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며, ‘자기 왕국’을 만들어갑니다. ‘신정 통치’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을 섬김으로 ‘하나님의 권위’를 자동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왕국의 통치자였지만 오히려 종처럼 ‘섬기는 왕’으로 성부의 권위를 나타내셨습니다. 자신이 내린 결정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원리와 맞는지, 혹이나 ‘나의 이익’과 ‘나의 권위’를 위한 발동에서 내려진 결정은 없는지 스스로 돌아봅시다. 진정한 통치의 정신은 다스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섬김의 자세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8~11)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지 못하고 자기 왕국을 바라보는 통치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잣대보다 자신의 동조자를 먼저 찾는 모순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르호보암이 세겜에 이르게 된 주목적은 여로보암이 북쪽에 있는 지파들을 통치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막기 위한 방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북쪽 지파의 문제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습니다. 그는 두 분류의 ‘모사’들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할 길과 방향을 잡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문에 응하는 르호보암의 자세였습니다. 그는 노인들의 자문을 버립니다. 자신에게 아부성 발언을 잘하는 ‘함께 자란 소년들’의 조언을 따릅니다.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아버지는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였으나 나는 전갈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리라 하소서”(11절)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힘의 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을 따라 ‘복종하는 원리’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기 왕국을 바라보는 통치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잣대가 되는 것보다 르호보암처럼 자신의 동조자를 먼저 찾는 모순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잣대가 되는 ‘하나님께 속한 작은 자’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바요,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움직이게 하는 모습이 됩니다.
(적용)
신앙의 쇠퇴는 먼 곳으로부터 일어나지 않습니다. 르호보암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지 않고 세속적인 힘의 원리를 바라보는 모습 속에서 일어납니다. 두 방향의 지혜가 있습니다. 한 방향은 세상적인 원리로 볼 때, 아주 현명한 논리와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머리로부터 주어지는 지혜입니다. 다른 하나는 아주 원론적이지만 그 말씀을 들었을 때 나의 마음에 찔림이 있고, 두려움이 생기고, 듣기는 싫지만 마음으로부터 들리는 말씀의 지혜가 있습니다.
인본적인 자기 왕국을 바라보는 자는 자기 생각과 감정에 맞지 않는 지혜는 고리타분한 액세서리로 여기고 그것을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왕국을 이루길 원하는 자는 원론적이지만 자신의 양심을 찌르게 하고,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지혜의 말씀을 따릅니다. 그 결과 머리로 지혜를 판단한 자에게는 그 지혜가 자신에게 올무가 되어 사망 권세 속에 빠뜨리는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부터 들리는 지혜를 따르는 자는 회개와 하나님을 향한 무릎을 통해 ‘영원한 생명’과 함께 이 땅 위에서도 하나님의 넘치는 축복의 통로에 서게 됩니다. 복된 삶의 주인공이 됩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 영광을 위해 달려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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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행복한사람님의 댓글
행복한사람 작성일
솔로몬의 잘못된 신앙으로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분열되는 비극과 함께
여로보암과 르호보암 역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축복하시고자 하지만
솔로몬의 변질된 신앙으로 이스라엘은 분열왕국으로
각자 자기왕국을 만듭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으로 하나님을 향한 신정통치국가를
다스려야하지만 신앙의 변질로 하나님께 구하는 신앙이 아니라
주변의 도움을 청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봅니다
이러한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라고 자부하면서도
때로는 주변의 환경과 주변의 말을 귀담아 듣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넘어지고 쓰러지고 분내고 화내는 일들도 있습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절대적인 신앙의 자세가 되어야합니다
오늘도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삶은 항상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달려가는
복된 자의 길을 걸어가기를 원하며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축복의 통로에 서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