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3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 왕상 19장 9~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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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금) | 왕상 19장 9~14절 |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
19:9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9:10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19: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9: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19:13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9:14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
(도입)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계심을 인정하면서도 초월적인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초월성에 관하여 고대사회나 일부 현대 신학자들 가운데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존재의 한계점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는 분은 맞지만 우주의 운행이나 인간의 삶에 대해서는 개입하지 아니하시는 분이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초월적’인 것에 관하여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세상사에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세상 너머에 존재하고 계시는 분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오늘도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하심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아합과 바알 선지자 450명과의 갈멜산 대결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목격한 산 증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세벨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 도망자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엘리야에게 세미하게 다가섭니다. 갈멜산의 대결과 이세벨의 칼날을 피하여 자신의 지친 발걸음을 이끌고 호렙산에 도착한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그의 심령을 파고드는 음성으로 접근하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에 있느냐?”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때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의문을 느끼며, 신앙의 갈등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에 있느냐?”라는 음성이 나에게는 어떻게 다가오고 있을까요?
(9~10) 자기 신앙의 열심과 특심만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궁지에 몰아넣는 신앙의 우를 범하게 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이세벨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북이스라엘의 사역지를 떠나, 남쪽 브엘세바에 이른 엘리야는 자신의 사역에 대하여 회의감을 느끼고 낙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의 가치를 잃어버립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위로하고, 그에게 새 힘을 부어줍니다. 하나님의 위로하심에 힘입어 엘리야가 도착한 곳은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역사의 현장인 ‘호렙산’이었습니다. 그를 향해 하나님께서는 반응합니다. 하나님의 반응은 강력한 초자연적인 역사함을 통하여 그에 다가선 것이 아닙니다. 엘리야는 지금까지 자신이 느껴보지 못한 하나님의 또 다른 역동적인 음성에 휘감기게 됩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9절)
하나님의 역동적인 질문은 엘리야로 하여금 자신의 현재 상황과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돌아보도록 만드는 하나님의 질문이었습니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아담을 향하여 “네가 어디 있느냐?”라며 자신의 죄를 돌아보도록 하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패배 의식에 사로잡혀 자신의 사명을 잃어버렸던 엘리야로 하여금 자신의 사명을 다시 돌아보도록 합니다. 신앙을 열심과 특심으로 달려갔던 사람들에게는 지금 엘리야의 모습과 같은 현상들이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신앙은 열심도, 특심도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중요한 것은 열심과 특심이 자신의 신앙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으로 모든 포커스가 맞추어져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11~12) 흐트러진 사명자의 모습을 재정립을 시킬 수 있는 것은 기적과 이적의 흔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세벨의 위협을 피해 호렙산에 있는 굴에 피신한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세미한 음성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엘리야에게 말씀합니다.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11절) ‘여호와 앞에 선다’는 것은 (창 18:22)에서는 하나님께 ‘중보기도’로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신 19:17)에서는 소송 당사자들이 재판을 위해 하나님을 대신하고 있는 제사장과 재판장 앞에 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가 하면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충성심’과 ‘헌신의 자세’를 재정립하기 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로 하여금 ‘호렙산’에 서도록 한 것은 엘리야를 새롭게 무장시키겠다는 하나님의 강한 뜻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서 있는 엘리야를 지나갑니다. 이때 하나님의 모습은 3가지의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크고 강한 바람’, ‘지진’, ‘불’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에 대한 것이지 이것으로 능력을 발하여 엘리야를 새롭게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열심과 특심으로 판단하다가 무너진 엘리야의 신앙을 재정립시킵니다.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12절) 이미 골이 깊어진 불신과 패배주의의 의식구조는 외적인 동기부여를 통해 완전한 회복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그 모습은 마치 잠재된 활화산과 같아서 언제 다시 폭발할지 모르는 ‘활동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정체성으로 인해 무너진 신앙과 사명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그를 다시 진실된 하나님의 일꾼으로, 온전한 신앙으로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13~14) 하나님께서는 신앙의 회복과 깨달음을 통해 그를 하나님 나라 영광의 기수로 사용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현현이 엘리야에게 임했을 때 엘리야에게 나타났던 반응은 죽음을 면하기 위해 하나님과 대면하지 않도록 자신의 얼굴을 겉옷으로 가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정체성에 대해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엘리야를 향해 동일한 말씀으로 그에게 다가갑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13절) 그는 자신의 상황만을 말합니다. “나는 여호와께 열심히 유별하오니 ...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빼앗으려 하나이다” 그는 하나님께 반복적인 대답만을 일삼고 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 회복을 원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여전히 깨달음을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는 질문으로 세 가지의 분명한 깨달음을 주고 계셨습니다.
첫 번째는 엘리야로 하여금 과거의 자신이 하나님께 어떤 신앙의 모습으로 세워졌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두 번째는 엘리야로 하여금 자신의 신앙의 현주소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깨달아 알도록 합니다. 세 번째는 엘리야로 하여금 더 이상 패배주의자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승리의 깃발을 높이 드는 영광의 기수로서 미래의 사역을 감당하는 자가 되도록 믿음의 결단을 촉구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처럼 그릇된 신앙의 정체성 가운데 빗어진 우리의 신앙에 대해 질책하고, 책망하기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먼저 깨닫게 합니다.신앙의 인격을 새롭게 만들어 갑니다. 그리고 이렇게 세워진 나를 하나님 나라 영광의 깃발을 들게 하는 기수로 사용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적용)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하나님께서는 지금 나의 신앙의 정체성을 묻고 계십니다. 과거 믿음이 뜨거웠던 자는 주님을 향한 ‘첫사랑’을 회복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잘 알지 못한 자를 향해서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깨달아 알도록 합니다. 이런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재점검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를 통해 신앙의 정체성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 나라 사명의 기수로 쓰임 받도록 이끌어가고 계십니다. 나의 신앙의 정체성은 다른 환경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신앙의 오만한 잣대로부터 시작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 가운데 말씀이 가라 하면 갈 것이요, 말씀 서라고 하면 서는 신앙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의 길에 서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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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행복한사람님의 댓글
행복한사람 작성일
엘리야는 아합과 바알 선지자 450명과 갈멜산 대결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일하심을 목격한 산 증인이지만
이세벨의 칼날을 피하여 호렙산으로 숨었을때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고 물으시며
엘리야를 새롭게 무장시키십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하나님께 어떠한 모습으로 세워졌는지를 돌아보게 하고
자신의 신앙의 현 주소와 더 이상 패배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주십니다
오늘 말씀이 나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처음 믿었을 때의 뜨거웠던 첫 사랑이 회복되어지기를 원하며
나의 신앙의 현 주소가 어떠한지 나를 돌아보며
신앙의 적당주의자가 되지는 않았는지 나를 점검하는 시간을 가지며
하나님앞에 나의 현실의 신앙을 고백하며 회개합니다
신앙의 확실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삶이 되어
하나님 나라의 일에 게으른자가 아니라
승리의 깃발을 올릴 수 있도록 날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도전적으로 열심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라 하면 가고
서라 하면 서는 신앙의 자세로 오직 하나님 나라의 영광의 길에 서는 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다니엘쌤님의 댓글
다니엘쌤 작성일
오늘도 모든 역사를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나와 당신이 아닌 제 3자의 신앙을 칭찬하는 소리를 종종 듣습니다.
다른 성도들이 보기에 제 신앙의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 모르지만, 저는 죄인입니다.
오늘도 죄를 지었고, 어제도 그저께도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내일도 지을 것 같습니다.
내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습관을 이기지 못하여 죄를 지을때도 많고, 그 것이 죄인지도 모르고 짓다가 말씀을 통해서 깨달은 적도 한 두번이 아닙니다.
죄를 발견하고 회개기도를 할 때도 있었지만, 못 할때도 많았습니다.
그런저를 구원해주시고, 사역 사명을 주셨는데, 그 은혜를 하나님의 방법데로 표현하지 못하고, 인보주의 적인 모습으로 열심을 내며 달려가다 낙망하며, 하나님을 의심하며 불평하는 자가 저임을 고백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거기 있느냐"라는 질문을 나에게 적용해보니 이런 제 모습이 묵상이 됩니다
하지만 책망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으로 하나님이 누구신지 보게 하시고 깨닫게 하셔서 일으켜주시고 회복을 시켜주시니 나의 적은 믿음이 다시 타오르는 것 같습니다.
다음주는 교회 부흥회가 있습니다. 지금 학원에 바쁘고 급한 일이 있어 신경쓰지 못 했는데, 다시 힘을 내어 열심을 다해보길 다짐해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