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7일) 불의한 자 앞에서 = 왕상 21장 11~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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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금) | 왕상 21장 11~16절 | 불의한 자 앞에서 |
21:11 그의 성읍 사람 곧 그의 성읍에 사는 장로와 귀족들이 이세벨의 지시 곧 그가 자기들에게 보낸 편지에 쓴 대로 하여 21:12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 앉히매 21:13 때에 불량자 두 사람이 들어와 그의 앞에 앉고 백성 앞에서 나봇에게 대하여 증언을 하여 이르기를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매 무리가 그를 성읍 밖으로 끌고 나가서 돌로 쳐죽이고 21:14 이세벨에게 통보하기를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나이다 하니 21:15 이세벨이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다 함을 듣고 이세벨이 아합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돈으로 바꾸어 주기를 싫어하던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소서 나봇이 살아 있지 아니하고 죽었나이다 21:16 아합은 나봇이 죽었다 함을 듣고 곧 일어나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러 그리로 내려갔더라 |
(도입)
이세벨은 불법과 회유, 처세술로 자신의 뜻을 이뤄냅니다. 마치 광야의 여우와 같은 여인이었습니다. 이세벨은 북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이 아니라 바알을 향하도록 방향을 선회시킨 아주 극악한 여인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정치와 사법권은 바알의 우상을 전파하고 있었던 이세벨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놀아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며, 하나님 편에 서서 살아가는 자를 보호해야 할 왕이 하나님 편에 서서 살아가는 자를 오히려 제거하는 불의를 자행합니다. 그 중심에 불의한 이세벨이 있었습니다.
이세벨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거짓 증인을 앞세웁니다. 그리고 나봇 죽이는 일을 마치 합법적인 것처럼 위장을 합니다. 이와 같이 불의한 자는 하나님 나라를 이뤄가는 일에 가장 큰 걸림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의한 자는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는 데 있어서 마치 커다란 산맥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뜻을 이뤄가는 자들은 이런 불의한 자들을 향해 어떤 신앙의 자세를 취해야 할까요?
(11~12) 불의한 자가 자신을 향해 위협적으로 다가오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는 자는 흔들림 없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서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불의한 이세벨은 나봇을 코너에 몰아넣기 위해 북이스라엘의 실세인 자신 앞에 줄을 선 권력의 시녀들인 ‘장로와 귀족들’에게 편지를 합니다. 나봇을 죽이기 위해 거짓된 증인 ‘둘’을 내세워 모든 일을 차질 없이 진행하도록 명합니다. 여기에 대한 장로들과 귀족들의 반응은 놀라울 정도로 ‘즉각적’이고 ‘적극적’이었습니다. 이런 반응은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 가운데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불의한 이세벨에 대한 두려움의 반응이었습니다. “이세벨의 지시 곧 그가 자기들에게 보낸 편지에 쓴 대로 하여”(11절) 이세벨과 함께 하나님 앞에 불의한 길을 걸었던 장로와 귀족들은 ‘언약적 관점’에 서 있는 나봇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바알의 선지자인 이세벨의 명령에 즉각적으로 순종하며 북이스라엘을 죄악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갑니다.
자신들에게 달콤한 사탕을 제공하는 이세벨을 따랐던 ‘장로와 귀족들’은 나봇을 곧바로 체포합니다. 그리고 관습에 따라 공개 재판을 하기 위해 나봇을 피고인이 앉는 ‘높은 자리’에 앉힙니다. 그들은 나봇이 무죄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봇을 오히려 하나님 앞에 ‘불의한 자’로 여기고 죄인의 자리에 세웁니다. 이때 라봇은 하나님과 언약적 관점을 지키기 위해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돌이켜 봅시다. 사탄은 이 시대 가운데 놓인 우리를 끊임없이 흔들며, 위협을 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결정은 라봇처럼 흔들림 없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자신을 세우는 신앙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여기에 대해 갈등의 구조가 아니라 불의한 자들이 두려움을 가질 만큼 흔들림 없는 신앙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13~14)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는 자는 신앙을 지켜 나가는 일에 흔들림이 없는 일사 각오의 자세로 불의한 자들 앞에 당당하게 맞서야 합니다
나봇을 불의한 법정에 세운 불의한 자들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격식을 갖추어 재판을 일사천리로 진행합니다. 나봇을 죄인들이 앉는 공개 재판석인 ‘높은 자리’에 앉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재판을 지켜보도록 합니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에 따라 ‘두 증인’이 법정에 나서서 나봇을 고발합니다. “나봇에게 대하여 증언을 하여 이르기를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매”(13절) ‘두 증인’은 나봇의 죄를 알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이세벨의 계획대로 세워진 ‘불량한 자들’이었습니다. (신 16:18~20)은 백성을 재판할 때 사사로운 감정으로 재판하지 말고 ‘공의’로 백성을 재판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신 19:15~21)에서는 ‘두세 증인’을 세워 재판에 억울함이 없도록 명합니다. 뿐만 아니라 거짓 증거로 형제를 모함하면 그 자를 ‘악’으로 여기고 ‘거짓 증거자’를 제하여 버리도록 명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9계명에서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라고 명하셨습니다. 나봇을 향한 재판은 모든 것이 불법이요, 하나님을 기만하는 모습으로 진행됩니다. “무리가 그를 성읍 밖으로 끌고 나가서 돌로 쳐죽이고”(13절) 그러나 나봇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죽음 앞에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보다 신앙을 지켜 나가는 일사 각오의 자세를 선택합니다. 그는 끝까지 불의한 자들 앞에 당당하게 맞섭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는 자는 신앙을 지켜 나가는 일에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의 억울함을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겁니다. 사탄과 그의 불의한 세력들은 (계 20:10)과 (14절)의 말씀처럼 ‘영원한 불못’에 던짐을 당하게 됩니다. 흔들림 없이 신앙을 지켜 나가는 일사 각오의 자세로 불의한 자들 앞에 당당하게 맞서야 합니다.
(15~16) 불의한 자들이 불법으로 자신들의 형통을 찾을 때도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는 자는 그 불의함 앞에 하나님의 뜻을 세우는 신앙의 자세로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는 죄목으로 나봇을 죽인 ‘불의한 법정’은 나봇의 재산을 국고로 환수시킵니다. 권력의 시녀들은 자신들의 실적을 자랑하기 위해 이 소식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던 이세벨에게 제일 먼저 소식을 전합니다. “이세벨이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다 함을 듣고”(15절) 이세벨은 아합을 찾아갑니다. “이세벨이 아합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돈으로 바꾸어 주기를 싫어하던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소서 나봇이 살아 있지 아니하고 죽었나이다”(15절) 이세벨의 말 속에는 자신의 ‘가나안 신’이 이스라엘의 ‘여호와’를 이겼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왕은 바알의 이름으로 그 땅을 차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알의 권세로서 나라를 힘 있게 다스리라는 겁니다.
비록 나봇은 죽었더라도 그 포도원은 나봇의 포도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봇의 기업인 포도원을 결코 아합에게 기업으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아합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최후의 통첩을 내립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재앙을 네게 내려 너를 쓸어 버리되”(21절) 성도는 자신의 이익을 먼저 계산하는 자가 아닙니다. 그것이 정당한가를 먼저 생각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저버리는 결정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결정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옳고, 그름을 나의 의지적인 판단으로 결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기록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결정하는 복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가운데 달려가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 눈물을 친히 닦아주시고, 위로하여 줍니다.
(적용)
탐욕과 향락과 사치 그리고 불법이 판을 치는 세상에 우리는 놓여있습니다. ‘무사안일주의’와 ‘보신주의’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총체적 타락 속에 놓여있는 이 시대,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낫다라고 악을 방조하고 있는 이 시대, 정의와 도덕은 이미 무너져있습니다. 힘과 권력을 가진 불의한 자 앞에서는 굴종적인 자세를 취해야만 살아남는다는 ‘생존의 비법’이 이 시대를 더욱 비열하게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악을 알면서도 따르고, 타협하고, 방조하는 자는 그 자신 또한 악의 공범자입니다. 불의한 자가 자신을 향해 위협적으로 다가오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자는 흔들림 없이 일사 각오의 자세로 하나님을 향한 신앙으로 서 있어야 합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자세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서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여 자신의 뜻을 이룹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합니다. “그것은 나봇의 포도원이다!” 세상의 불의한 일에 자신을 파는 자는 하나님을 그 앞에 굴종시키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의 눈물은 닦아주지 않습니다. 나봇처럼 자신의 모습이 연약하지만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는 자신의 모습 속에 있는 연약함을 보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게 주어지는 상급을 나봇처럼, 스데반처럼, 바울처럼 바라보며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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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행복한사람님의 댓글
행복한사람 작성일
이세벨의 불의한 행동에 장로들과 귀족들은 즉각적이고 적극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바알의 우상앞에 엎드리게 하는 이세벨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보다는 바알을 숭배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보다 불의한 자를 따르며
불의한 것이 마치 합법인것처럼 행합니다
신앙은 세상과 타협하는 것이 아니고
불의한 것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워가는 백성으로 흔들림 없이
나의 신앙을 견고하게 세워나가고
날마다 하나님 뜻 가운데 서는 성도가 되어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변함없이 감당하는 신앙의 자세를 가지기를 원합니다
불의한 자들의 불법으로 세상이 주는 이익을 과감히 떨쳐 버리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나아가는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다니엘쌤님의 댓글
다니엘쌤 작성일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기를 힘쓰는 자에게 진정한 위로와 승리를 주십니다.
불의 앞에서 나봇은 눈앞에 보이는 두려움과 형통보다는 하나님의 향한 신앙을 선택합니다.
군중들에게 돌에 맞아 순교한 스데반, 복음을 전하다 죽을 고초를 수없이 당한 사울, 그외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불의앞에서도 당당당하게 신안을 선택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처한 상황과 맥락에 비추어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하거나 추론하여 언행을 합니다. 지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한 선택이지 비겁하다고 말할수 없는 것이 세상의 관점일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가진 나봇은 일사각오로 신앙을 택합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진정한 위로만을 바라며, 눈에 보이는 권력과 사람들의 말속에서 두려워 하지 않고 굳건하게 신앙을 선택하였습니다.
인간은 연약합니다. 하나님께서 연약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하나님만 의지함으로 완전함에 이를 수 있도록 만드셨다는 목사님의 설교가 떠오릅니다.
나봇처럼 이런 상황속에서도 신앙을 선택할 수 있도록,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그 연약함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만 의지하는 신앙으로 담대하게 채워가는 하루하루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오늘 제게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이 무엇인지 묵상하게 됩니다.
오늘은 금요전도가 있습니다.....
전도지를 나눠 줄때마다 힘이 나는 것이 아니라 힘이 빠질때가 더 많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의 관점이 아닌 세상의 관점으로 판단하기 때문일것입니다.
진정한 승리와 위로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으며 나를 위해 언약에 신실하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언약을 지켜 나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길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