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9일) 신앙의 발걸음 = 합 1장 12~2장 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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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월) | 합 1장 12~2장 3절 | 신앙의 발걸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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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박국 선지자가 활동하던 B.C. 612년~605년은 역사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대였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최고의 군대를 자랑하던 앗수르에 이어 절대강자인 애굽이 갈그미스 전투에서 신흥제국인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제압 당하는 일대 대격변이 일어납니다. 유다는 여기에 대해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됩니다. 애굽에 의해 유다왕국의 왕위에 올랐던 여호야김이 B.C 605년 쇠사슬에 결박당한 채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바벨론에 의해 왕으로 세워집니다. 그러나 그 또한 바벨론에 의해 ‘석 달 열흘’만에 왕위에서 쫓겨나고 그의 숙부인 시드기야가 바벨론에 의해 왕으로 세워집니다. 이런 격동기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하박국을 선지자로 세웁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박국을 통해 유다가 무엇 때문에 격동기의 환난을 겪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다른 길을 걸으면서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자부했던 유다를 향해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집니다. “너희들이 하나님을 버린 고로 너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노라!” 하박국 선지자를 통해 들렸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씀은 후에 사도 바울과 히브리서 기자의 신앙의 핵심을 이루게 되며, 마틴 루터에 의한 종교 개혁의 첫 단추가 되기도 합니다. 과연! 신앙의 발걸음은 무엇으로부터 그리고 어떻게 첫 발걸음을 시작해야 할까요?
(12~13) 신앙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을 향해 패역한 유다를 심판할 때 이방 나라인 바벨론을 사용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신들과의 관계를 결코 깨뜨리지 않을 것을 네 가지 이유를 들어 확신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은 ‘여호와’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피조 된 분이 아닙니다. ‘자존자’입니다. ‘자존자’이신 하나님은 한번 언약을 맺은 것에 대해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언약은 반드시 이행하시는 분이라는 확신을 가집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네 번째는 하나님은 ‘만세 전부터 계신 분’입니다. 하박국의 확신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일어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다 이해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진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사람의 방식으로 이해하게 되면 신앙은 언제나 그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고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네 가지’ 사실을 통해 밝혔던 것처럼 하나님은 완전한 분입니다. 틀림이 없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내가 이해하는 것으로 신앙하려고 하니 우상에 빠져들게 되고, 이단에 빠지게 됩니다. 내 방식과 내 방법대로 신앙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무너뜨립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신뢰하는 것으로부터 신앙은 시작되어야 합니다.
(14~17) 신앙은 내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선민’이 어떻게 버림을 당하게 되었는지 하소연이 섞인 호소를 통해 말문을 엽니다. “하나님은 어찌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낚시꾼이 던진 낚시와 어부가 던진 그물에 무참하게 잡혀버린 바다의 물고기 같게 하십니까? 하나님은 어찌하여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아오던 ‘선민’을 인도자가 없는 벌레처럼 무가치하고, 비천한 존재로 살아가도록 내버리십니까?” ‘낚시’와 ‘그물’과 ‘투망’이 바벨론을 상징하며,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사로잡혀 갈 것을 동시에 나타내고 있습니다. 잔인하기로 정평이 난 바벨론에 의한 심판이 ‘낚시’와 ‘그물’, ‘투망’으로 나타나는 것은 남녀노소, 큰 자나 작은 자 가릴 것 없이 무차별적인 학살로 그 모습이 나타날 것을 대변합니다.
하박국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 것은 바벨론을 통해 이뤄질 하나님의 이 일이 하나님의 일하심이 아니라 바벨론 신의 승리로 그 모습이 비치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통해 달려가다 보면 많은 부분 이해가 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라!” 나의 판단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의 단추를 끼워야 합니다. 믿음의 신앙의 단추가 바로 끼워진 곳에는 텅 빈 외양간에 소가 갑절로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믿음의 눈으로 신앙의 발걸음을 내디뎌야 합니다.
(2:1~3) 신앙은 내가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 달려가는 걸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위해 달려가는 걸음으로 시작을 이뤄가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는 하박국이 원하는 것으로 응답하지 않습니다. 두 가지로 응답합니다. 첫 번째 응답입니다.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겨라!” 하박국을 통해 선포된 말씀은 하박국의 생각과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위해 예언된 말씀입니다. 두 번째 응답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판에 새겨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도록 하라!”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하신 말씀을 ‘판’에 새기는 것으로 응답합니다. 새기라고 명한 것은 어떤 순간에도 이 말씀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도록’ 그 말씀을 새기라는 것은 두 가지 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주어진 계시의 말씀을 ‘종이’나 ‘돌’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 판’에 새겨 이 말씀을 영원히 잊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 계시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아는 자는 지체하지 말고 이 말씀을 널리 전파하라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은 내가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 달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때를 위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신앙은 내가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 달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루심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때를 향해 달려가는 것으로 신앙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적용)
신앙을 자신이 잘되기 위한 기복적인 수단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의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합니다. 처음부터 신앙을 잘못 배우면 정말 힘들어집니다. 하나님은 남은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신성이 친히 인성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을 사람의 머리로 이해하고, 판단하는 신앙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에덴동산의 하와처럼 넘어지는 자가 됩니다. 약속의 말씀대로 종말은 반드시 옵니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은 반드시 이뤄집니다. 이것을 사람의 머리로 이해하지 말고, 믿음의 눈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사람의 머리로 행하는 신앙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단추를 끼우며, 신앙의 걸음을 걸어가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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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행복한사람님의 댓글
행복한사람 작성일
사람은 피조물이며 하나님은 '자존자'이십니다
하나님의 피조물로 하나님을 사람의 생각과 판단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으로 나아가는 신앙이 되어야겠습니다
신앙은 나의 유익을 구하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바라보며 나아가는 신실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날마다 말씀의 거울에 나를 비춰보아
회개하는 신앙과 주의 일을 열심을 다하는 충직한 일꾼이 되기를 원합니다
나는 오늘도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는 어리석은 발걸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쓰임받는 성도가 되는 복된 발걸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coco님의 댓글
coco 작성일
말씀을 읽고 붙들며 기도하고 말씀을 마음판에 새겨 영원히 잊지 않고 전파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인내로 달려가기를 원합니다

















